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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錄으로 본 朝鮮의 奇人들
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한 한국사의 천재 이율곡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 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 사상가이며,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정치적인 얘기는 접어 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일본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 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 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이상 등장하는 송시열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때이며 효종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경우가 많았는데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했다.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때까지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골수 선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수 있다.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증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 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한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 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 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천재 가문에 또하나의 천재(이율곡의 아우) 이우
"왕대밭에 왕대난다" 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왕대밭에 왕대난다" 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또 하나의 천재 가 있다..
바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
그는 조선조 통털어 시,서,화,금[詩,書,畵,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4절로 불려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천불여이물[天不與二物]이라 하여
하늘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어나면 지성이 모자라고,...
이렇듯 여러 재능을 겸비하기란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등을 잘 그렸으며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벌레인줄알고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들 경절도 書,畵,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그의 아들 경절도 書,畵,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신사임당의 삼절과 자신의 사절을 합치면 십절이 탄생되어
불세출의 기록을 역사속에 남겼다.
신사임당 家의 천재적 재능은
오늘날에도 살아숨쉬며 역사속의 거울이 되고 있다..
과거급제 60년만에 판서가 된 윤경
인간은 불평등 한 것일까?
인간은 불평등 한 것일까?
앞장의 정태화 같은 인물은 판서란 직책은 모두거치며
정승도 여러차례 거쳤는데,
누구는 급제 60년만에 겨우 판서에 올랐으니 말이다.
관료들의 경노당 최고령 기록을 갖고 있는 윤경은 30세에 급제하여
90세가 되는 60년만에 공조판서가 되는 불가사이하고 유일무이한
진기록을 갖고있다.
90이 될 때까지 인내하고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버텨낸
90이 될 때까지 인내하고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버텨낸
그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는 인간승리의 전형을 보여 준 예라 하겠다.
마음이 너그럽고 욕심이 없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까?
윤경은 98세까지 살다 간 장수인물이며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83세에 과거급제한 인간승리 박문규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 급제자 박문규.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 급제자 박문규.
83세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최고령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박문규는 최고령 급제라는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떠난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나이에 자기도전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80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는가?
그 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는 문신중심의 사회이고 문관에게 가문의 영광과 명예가 주어지며
부의 축적은 물론 부인의 축첩 등 수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시험은 양반들의 유일한 출세길이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83세의 박문규는 과거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약 50여년을 시험에 매달렸으니 아마도 수 십 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지상과제의 한을 풀어서인지 그 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6세에 처음 장가 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 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인공은 홍유손.
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 있다.
섹스심벌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어우동은 성종 때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도 책마다 다른데,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 이라고 되어있다.
어우동의 시댁은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어우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어우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하였고, 특히 근친 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하였다.
한국의 3공화국때 정인숙 LIST처럼 그는 어우동 LIST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나중에는 도승지 김계창의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 끝에 삶의 여정을 끝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 일찍 급제하였다 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 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 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시험 부정행위
조선(朝鮮)에는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조선(朝鮮)에는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과거에도 지금과같이 많은 부정행위가 있었고 그 적발사례가 있다.
태조(太祖)에서 철종(哲宗)까지 472년간의 역사(歷史)를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면밀히 살펴보면
문무시험 공히 시험 부정행위 및
그 처벌(處罰)에 관련된 기록(記錄)을 찾을 수 있다.
실록(實錄)에 따르면
실록(實錄)에 따르면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기록은 태종조에 처음 등장(登場)한다..
경승부윤(敬承府尹) 김 점(金漸)의 아들이 문과시험을 치렀는데
그 답안(答案)을 고쳐 쓰게 해 적발(摘發)되자
태종에게 용서(容恕)를 빌었다는 대목이다.
특히 세종조 기록에는
부정행위 유형(類型)과 처벌에 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눈길을 끈다.
'고려말기 과거법이 크게 훼손(毁損)돼 시험 보러 가는 사람이
'고려말기 과거법이 크게 훼손(毁損)돼 시험 보러 가는 사람이
남을 고용(雇用)해 대신 답을 쓰게 하고
시험을 관장한 사람이
아는 사람을 먼저 뽑으려고 부정한 짓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다른 사람을 시험장에 보내 제술(製述)한 자에게는
과거 시험자격을 영원히 정지(停止)시켰고
속임수를 쓴 자에게 장(杖) 100대와 도형(徒形) 3년을 집행(執行)하고
영구히 서용(敍用)치 않았다.
성종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성근(鄭誠謹)이 '무과 별시(別試)에서
성종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성근(鄭誠謹)이 '무과 별시(別試)에서
표적(標的)이 맞지 않았는데 감적관(監的官)이 북을 쳤고
4표적까지 화살을 쏘지도 않았는데
도청관(都廳官)이 5발 중 4발이 적중(的中)했다고 해
이들을 국문하게 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며
'과거(科擧)는 국가의 큰 일으므로 반드시 징계(懲戒)해야 할 것'이라고
왕에게 청(請)한 대목도 나온다.
중종 55년에는 동지사 허 굉이 중종에게 '세종조에는
중종 55년에는 동지사 허 굉이 중종에게 '세종조에는
책(冊) 지니는 것을 금단(禁斷)하는 법령(法令)을 엄중히 했기 때문에
초집(抄集)한 참고서적의 글씨를 잘게 써서
머리털 속에 감추기도 하고 입 속에 넣기도 해
과장(科場)에 들어왔는데 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폐단(弊端)이 많다'고 아뢰었다는 기록도 보여
과거에도 오늘날의 '커닝 페이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때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전 강릉부사 박경업(朴慶業)이
광해군 때는 사헌부(司憲府)에서 '전 강릉부사 박경업(朴慶業)이
강원도 시관으로 시험응시자 30여명의 답안지 겉봉에다
'삼가 봉한다'(謹封)고 손수 써 알아 볼 수 있도록 해
초장(初場) 시험에서 합격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된데다가
응시(應試)한 여러 선비들의 분노(憤怒)까지 사 과장을 파하고 말았다'는
대목도 보인다.
특히 숙종 33년
특히 숙종 33년
'국가의 성쇠(盛衰)와 인재의 득실은
오로지 과시(科試)의 공사(公私)에 달려있다'는
예조참의(禮曺參議) 박 권(朴 權)의 상소(上訴)는
이번 수능시험을 관리한 교육관청이 귀감(龜鑑)으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은 공정(公正)해야 하며 부정행위가 적발됐을 경우에는
예나 지금이나 시험은 공정(公正)해야 하며 부정행위가 적발됐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엄벌을 내려야 한다는 데 별 이견(異見)이 없는 것 같다.
또 부정(不正)을 저지른 과거(科擧) 응시자와 관원(官員)들을
탄핵(彈劾)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려 벌하게 하고 시험을 책임진 관리가
그 책무(責務)를 소홀히 했다며 자신의 파직(罷職)을 청한 사실은
모든 부정행위 사건에서 처벌(處罰)을 면(免)한 가담자와 관련 공무원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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