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삼청 교육대

깜상. 2012. 9. 18. 21:22
반응형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장한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사건개요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군 정찰국장 김정태로 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사건영향
1·21 사태 = 1968년 1월 21일 밤, 북한 특수부대 ‘124부대’ 소속 31명이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휴전선을 넘어 서울 시내까지 침투했다.

국군 복장을 한 이들은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도주했다.

이후 경기 북부 일대에서 1월 말까지 교전이 계속돼 31명 중 28명이 사살되고 김신조씨는 생포됐다.


시도는 이처럼 미수에 그쳤으나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 및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