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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1900년 전후사진

깜상. 2012. 2. 1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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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900년 전후 사진


American Electric Trolley, 1903
남대문으로 노면전차가 지나고 있다.



남대문 앞으로 일본군이 지나고 있다. 1903



괭가리, 징, 놋그릇, 갓, 촛대 등등...



당시의 광화문 정문





북쩍 거리는 장터



한약방
















조선시대의 곤장



전당포


 



개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모습
아직 눈이 남아 있는 계절이다.





멀리 언덕 위 높은 곳에는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이 3장의 사진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품

 

 


-- The Flag of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Korean Forces --
By Felice A. Beato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帥字旗)가
미해군 콜로라도함(USS Colorado,

배수량 3, 425 톤) 갑판에 걸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10월에 한국에 10년 동안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사족(蛇足) :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0일, 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란, 쇄국정책을 펼쳤던 구한말

흥선대원군 당시 발생한 조선과 미국간의

전쟁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1865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입항

하려다 이를 침략행위로 간주한 조선

군민에 의해 저지되고 이 결과 셔먼호가

소각되고 선원 전원이 처형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1871년 아시아 함대 5척을 동원해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이 결과 조선군민 25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비록 조선은 이 전쟁에서

우세한 미군에 패했지만 미국 역시

조선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0여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더욱 더 쇄국의 길로 접어

들게 되며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역시 더 한층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미양요때 전사한 조선군사들 모습
이틀간에 걸친공격에서 5개의 조선궁

요새가 점령당하거나 파괴되고
조선군은 700여명 가운데 250명이 전사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1971
년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영국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1832-1909)씨가

촬영한 한국의 선박(Junk, 猛船)

맹선(Junk, 猛船)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투에 사용된 선박으로
대.중.소맹선의 세종류가 있다.
Masters of Photography - Felice Beato
Samurai Photographs of the Nineteenth Century



호랑이 사냥꾼으로 불렸던 조선군들은
적에 잡히느니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해 잡힌 조선군 포로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사진의 조선군 2명은
자신들을 촬영하려하자 이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조선 침공에 나선 콜로라도함내
미군 고위장교들이 조선지도 앞에서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미해군측과 협상에 나선 조선 관리들의 모습이다.



1871년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우리측

문정관(問情官)이 포로협상단 대표가

미해군 군함에 승선 해
포로송환 협상을 위해 조선 포로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옛 조선시대(1920년대 전)의 의술



눈병 치료 그림을 그리고 눈병이 있는

눈에다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액귀를 아낸다.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을 그린 다음

그 복부에 칼을 꽂아 두어 말라리아를 퇴치했다.


장티부스를 예방하기 위해 소머리와

마늘을 문앞에 둔다. 경기도


전라남도에서는 말라리아 퇴치 방법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환자의 발바닥에에 쓴다.
환자가 남자인 경우 왼쪽 발바닥에,

여자인 경우 오른쪽 발바닥에다 쓴다.
사진에는 "박대용"이라고 쓰여있다.


맥주병으로 황담 치료
환자가 있는 방 앞에 맥주병을 걸어두면

황담이 낫는다고 믿었다.


환자의 옷이나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면 홍역이 낫는다고 믿었다. 평안남도


설사퇴치
밥대접 위에 젓가락으로 십자가로 올려 놓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경상북도


고추를 처마밑에 걸어 두면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 액운을 짊어진 -

강이나 갈버닥에 버리면
각종 병이 낫는다고 믿어왔다.



1904년 광화문과 남대문(세번째 사진) 전경
1904년 당시 광화문의 모습과 해태상에서

노는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미국 외교관 윌러드 스트레이트

( Willard Dickerman Straight)씨가 촬영한 것으로
미국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는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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