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혁 조회 86 추천 0 2009.03.01. 16:07 http://cafe.daum.net/04leekp/AtD9/39
안사(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전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조경단(肇慶壇)전주리씨의 시조이신 신라 司空公 이한(李翰)의 묘소.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에 있다. 태조고황제께서 守護軍(수호군)을 두어 건지산 묘역을 守直(수직)케 했으며 역대 제왕도 묘역일댈보호 하였다. 특히 고황제께서는 광무3년(1899)에 단(壇)을 모으고 매년 1회 제사를 봉햇으며 450정보의 단역壇域)을 마련하게 하였다.단은 장방형의 돌을 사용하여 둘레를 쌓아 만들고 단의 주변에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는 담을 쌓았다.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남향의 문에서 20m 떨어져 비석이 있다.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cm, 두께30cm, 높이 202cm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대한조경단이라고 쓰여진 전제가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변이 7.2m의 정방형의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호남지』 전주 단묘에 의하면, 조경단 재건지산 세전 사공공기재차무징 고종기해설 건각입비 수봉관일이라 하였는데, 고종기해는 광무3년이므로, 이때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기념물 제3호(1973. 6. 23 지정) <그림>건원릉(健元陵) 테조고황제의 릉 태조께서 테종 8년( 1408) 5월 24일네 승화 하시자 동년 9월 9일에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 현 구리시) 검암산에 모시고, 태종 9년(1409) 4월에 吉昌君 權近(권근)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에 건립되었다. 조경묘는 경기전 담 밖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모셨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전과 조경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의지와 봉건적 규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 유형문화재 2호, 16호) . 전주이씨(全州李氏) 벼슬을 지냈으며 그 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 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 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기술할 필요가 없다. 파로써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승 1명과 숱한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등이 빼어나다. 이원익(李元翼), 흥선대원군(興宣大元君) 이하응,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등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이수광은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 1627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여러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 천주실 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와 1614년(광해군 6 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주 이씨 계보도]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秋) ↓ (10대) ↓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 ↓ 1. 사공(司空) 이한(李翰)──────김씨 ↓ 2.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 ↓ 3.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 ↓ 4. 아간(阿干) 광희(光禧) ↓ 5.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이입전(李立全) ↓ 6. 이긍휴(李兢休) ↓ 7. 이염순(李廉順) ↓ 8. 이승삭(李承朔) ↓ 9. 이충경(李充慶) ↓ 10. 이경영(李景英) ↓ 11. 이충민(李忠敏) ↓ 12. 이화(李華) ↓ 13. 이진유(李珍有) ↓ 14. 이궁진(李宮進) ↓ 15.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 ↓ ↓ 이의방(李義方)-------16.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隣)─────────문씨 ↓ ↓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 ↓ ↓ 17.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이씨 ↓ 18.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 19.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 20. 도조(度祖) 이춘(李椿) ↓ 21.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 2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계보(系譜) 1.이태조(李太祖)ㅡ2.태종(太宗)ㅡ3.세종(世宗)ㅡ4.광평대군(光平大君)ㅡ 5.영순군(永順君)ㅡ6.회웡군(會原君)ㅡ7.가평부정(加平副正)ㅡ8.석( ) 9.구익(求益)ㅡ10.유일(惟一)ㅡ11.상정(相靖)ㅡ12.주하(柱廈)ㅡ13.천정 (天挺)ㅡ14.언징(彦徵 )ㅡ 15.응현(膺顯)ㅡ16.호중(昊中)ㅡ17.의호(義浩) ㅡ18.태연(泰淵)ㅡ19인양(寅陽)ㅡ20.기하(起夏)ㅡ21.범식(範植)ㅡ22.무종 (茂鐘)*(만종.석종.시종)ㅡ23.규혁(揆赫)*(규상.규숭.규철)ㅡ24.민상(旻相) *(승상.찬희)ㅡ25.충현(忠泫)*(충훈.소정.유나.유담) 파 시조 아산 강청리에 뿌리내린 동기 8세손 상정(교위공)은광해주 폭정으로 인조반정에 서성부정인 방계파의 (댁내간) 모씨의 반정고변으로 뜻하지 않은 망명을(진천,백곡.갈월리)하게 되였음. 탈피고져 21세시 진천에서 뛰처나와 천안직산에서 금광을 운영하여 치부를하자 유명한 지관의 도음을받아 풍수지리설이 뛰여난 영인산 아래 아산 강청리에 토지와 가옥을 매입 전가족이 1803년도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였으며 자 태연 은 부를 바탕으로 한양에서 활약 마침내 왕께서 부모의 효가 지극하시여 친필을 하사 현재 강청리 정문에 보존되여있으며 종산에 가족묘를 형성 후손들의 묘가 순서에 따라 잘정돈 안치되여있음 광평대군 휘는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시호는 장의(章懿) 이다.1432년(세종 14) 8세 때 광평대군의 봉작을 받았다. 1436년( 세종 18) 12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뛰어난 재질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필독하고 <사서(四書) · 삼경(三經)에통달하고 <문선> 60권과 당나라의 이백(李白 : 701∼762) · 두보(杜甫 : 712∼770)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 1007∼1072)와 소식(蘇軾 : 1036∼1101) 의 문집을 두루 열람하고 더욱 <국어(國語)> 21권과 <좌전(左傳)>에 통달하고 음률과 산수에도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서법도 뛰어 나고 강궁(强弓)과 격구(擊毬)에도 능숙하여 전공하는 자도 미치지 못함 에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종부시의 일을 총간케 하였다. 세종대왕은 무안 대군의 후손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으로 하여금 후사를 명하여 제사를 정성껏 받들고 대부인 왕씨를 극진히 섬겨 충효의 도를 다하였다. 영순군 5개월만에 부친을 여의자 세종대왕은 가엽게 여겨 왕자의 예와 같게 대하였다. 1451년(문종 1) 8세 때 가덕대부 영순군의 봉작을 받고 1455년(단종 3)에 소덕대부에 승계되면서 풍저창승(豊儲倉丞) 최도일(崔道一)의 딸을 부인으 로 맞이하니 김제군부인(金堤郡夫人) 최씨(崔氏)이다. 1458년(세조 4) 흥록 대부에 승계되었다. 1466년(세조 12) 임금은 공경재보(公卿宰輔)로부터 하급 문신 모두를 궐내로 모이게 하고 손수 시제를 만들어 등준시(登俊試)라 하고 과거를 보려는 뜻 있는 사람은 종친이나 부마일지라도 모두 응시케 하였 다. 이는 관직이 높고 봉록이 후함만을 믿고 학문을 소홀히 함을 경계하고 학업을 정려(精勵)하여 문풍을 일으키고자 함이었다. 공도 응시하여 상급 5인 중에 뽑히었다. (精忠敵愾功臣)에 책정되어 현록대부에 제수되었다. 1468년(세조 14) 임금이 온양에 거둥하여 행재소에서 온양 중시(重試)를 보게 하였는데 공은 또 응시, 장원을 하였고, 임금은 환궁하여 공의 집으로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공의 학식이 높고 임금의 은총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 . 당시 종친 중에 문(文)에는 영순군, 무(武)에는 구성군(龜城君)을 ` 문무양현(文武兩賢)'이라 일컬어 왔다. 지금도 창경궁 뜰 안에 `문 영순군, 무 구성군'이라고 씌여 있는 표석이 서 있다. 휘는 정(?), 자는 돌지(突之). 대군의 장손이며 영순군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왕손이면서도 겸손하였다. 또한 예의 범절이 바르고 예법에 밝아 나라 제향에 여러번 헌관을 하였으며 의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의 수릉관이 되고 이어서 숭헌대부에 제수되고 1486년(성종 17) 가덕대부에 승계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소덕대부에 승계하고, 1506년(중종 1) 중종대왕 등극시 원종훈이 되고, 1519년(중종 14) 3월에 별세하니 향년 62세이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갑좌에 예장하였다. 청안군 휘는 영(嶸), 자는 미고(彌高). 대군의 손자이며 영순군의 차남이다. 공의 나이 9세 때 아버지 영순군이 별세하자 어머니 김제군부인의 가르침에 도리를 다하고 공도 어머니를 잘 받들어 사람들이 칭송하기를 모자(母慈 : 어머 니의 사랑)와 자효(子孝)가 똑같이 지극한 결과라고 하였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할 때 세조대왕이 총애하던 종실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베푼 일이 있어 공도 아우 회원군과 함께 잔치 자리에 나갔다. 일찍이 영순군이 위중할 때 성종대왕이 쟁(?)을 측은히 여겨 회원군(會原君)으로 봉군 하였기 때문에 잔치자리에서는 회원군이 윗자리에 앉고 공은 모로 꺾어 아랫자리에 앉자 정희왕후는 “아우가 윗자리에 앉고 형이 아랫자리에 앉는 까닭은 웬일이고?” 묻자 공이 “조정에선 벼슬로써 차례를 정함이 예인 줄로 아뢰오.”하였다. 그 경위를 들은 정희왕후는 즉시로 금대(金帶 )를 공에게 내리고 그 자리에서 청안군(淸安君)으로 봉하고 중의대부로 제수한 후 회원군의 윗자리에 옮겨 앉게 하였다. 이러한 영화를 누리던 공은 1495년(연산군 1) 12월에 별세하니 춘추 34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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